기식하기 1: The Vitruvian Dining
진정한 의미의 생산은 의심할 여지 없이 드물다. 그러한 것이 나타나는 순간, 곧바로 기식자들을 끌어들여 결국 흔하고 진부한 것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Real production is undoubtedly rare, for it attracts parasites that immediately make it something common and banal.
Michel Serres, The Parasite (1980/2007, p.4)
기식의 논리: AI 시대의 의미 생성
포스트휴머니즘 논의와 많은 접점을 갖는 프랑스 철학자 미셸 세르(Michel Serres)는 『기식자』 (1982)에서 라 퐁텐의 우화를 통해 기생을 사회의 기본 구조로 제시합니다. 도시 쥐가 세금 징수원에게, 시골 쥐가 도시 쥐에게 기생하는 연쇄적 구조는 한쪽이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는 비대칭성을 드러냅니다. 언뜻, 기식자는 착취만 하는 부정적 존재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세르의 핵심은 기식을 단순한 착취가 아니라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변혁의 과정으로 보는 것입니다. 기식자(P; Parasite)의 개입은 기존 체계를 교란하며, 이와 동시에 예상치 못한 연결과 경로를 생성합니다. "연쇄 과정이 지식 자체를 질서화한다"(“the cascade orders knowledge itself”)는 세르의 말처럼, 비대칭적 관계 속에서 새로운 지식이 출현합니다. 집단적 의미 생산과 변화를 가능케 하는 ‘관계적 역학’으로서의 기식 과정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는 AI를 통한 텍스트 생성과도 밀접히 연결됩니다. 사용자가 AI 챗봇에게 ‘기생’하여 텍스트를 생성받는 행위는 단순한 착취 과정이 아니라, 프롬프트의 재구성, 맥락의 재해석, 아이디어의 재조합이 일어나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새로운 의미가 생산됩니다. 어떤 아이디어가 퍼지고, 순환하고, 재사용되려면, 그것을 다시 설명하고 변형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AI와 대화하며 텍스트를 만드는 과정이 바로 이런 능동적인 재창조 작업에 속합니다.
1단계: 『건축십서』에서 건축 원리 추출하기
이러한 이론적 배경을 바탕으로 텍스트 생성 실험을 진행합니다. 실험의 목표는 비트루비우스의 전설적인 『건축십서』 (De Architectura) 제10권에서 일련의 원리들을 추출하여, 이를 가상의 다이닝(또는 ‘기식’) 시나리오로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고대 로마건축을 집대성한 『건축십서』의 제10권은 다른 권들과 달리 기계와 도구에 관한 내용을 다룹니다. 전쟁 기계인 스콜피오(scorpio)와 발리스타(ballista), 수력 장치, 측량 도구를 포함하여 물을 끌어올리는 장치, 무거운 물체를 운반하는 기중기, 공성 무기 등 고대의 기술적 지식이 담겨 있습니다. 당시 건축 개념은 오늘날보다 훨씬 넓은 기술 영역을 포괄하는 종합 학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기계들의 작동 원리를 마음껏 시식할 식사 준비의 맥락으로 옮겨보면서, 고대 기술 지식이 현대의 다이닝 시나리오로 어떻게 '번역'될 수 있는지, 이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경험할 수 있을지 탐색해보고자 합니다.
2단계: 추출한 원리를 다이닝 경험으로 번역하기
Claude에게 『건축십서』 제10권 나타나는 건축 원리들을 추출해서 다이닝 경험으로 바꿔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때 제 프롬프트는 Claude라는 Chat Model(P₁)에 기생하는 기식자가 됩니다.
하지만 Claude도 사실 기식자입니다. Claude는 인터넷(P₀)에 흩어진 수많은 텍스트 데이터로 학습되었고, 여기에는 물론 『건축십서』의 다양한 번역본과 주석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위의 다이어그램 왼쪽에 겹쳐져 있는 제10권의 페이지들이 바로 Claude가 이미 학습한 자료를 상징합니다.
결국 이것은 기생의 연쇄입니다. 제가 Claude에 기생하고, Claude는 인터넷 텍스트에 기생하며, 그 텍스트들은 비트루비우스의 원본에 기생합니다. 제가 추가로 넣는 프롬프트(P₃)는 이 연쇄를 계속 이어갑니다.
흥미로운 점은, Claude에게 요청하지 않았음에도 건축 원리를 각각의 캐릭터로 구현했다는 것인데요. Marcus, Aelia, Titus, Lucia, Felix 같은 이름들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 처음에는 의아해 했습니다.
The Liquid Choreography
The Chef Marcus arranged his kitchen in spirals where wine descended through Archimedes' screws and tympanum drums. Plates moved along gentle planes guided by the principles of grain mills, while servers followed paths measured by hodometers. Dishes emerged with the precision of water clocks, creating a choreography that becomes pleasure's foundation.
The Atmospheric Attunement
Aelia understood walls as permeable interfaces between external chaos and internal harmony. Her dining hall contained no elaborate climate systems―she had instead cultivated a relationship with the elements. In winter, strategic hearths created invisible architectures of warmth; in summer, cleverly positioned apertures moved air across perspiring foreheads without announcement. The perfect temperature is precisely the one that remains unnoticed, creating a resonance where the body dissolves its awareness of boundaries. The diner who shivers or sweats has been betrayed by architecture's failure to negotiate with nature.
The Equilibrium of Sustenance
The plate maintains a precarious stability, a temporary arrest of falling. Titus discovered that balance requires tension―mathematical distribution of forces in perfect stasis. True stability emerges not from simplistic flatness but from invisible counterbalance. The eye calculates structural integrity in milliseconds; the hand anticipates weight distribution before fork touches food. The unsteady plate creates unsteady digestion, transferring anxiety from presentation to consumption. Stability breathes, adjusts, redistributes as it diminishes through consumption―the master chef creating not merely flavor but structural confidence.
The Protective Hospitality
Dining is vulnerability made ritual. To eat is to dissolve the boundary between self and environment. Lucia's tables created an invisible fortress around this vulnerability―strategic placement ensuring diners observe without being observed, acoustic partitions creating intimate spaces within public rooms. The body never forgets its origins as prey; the diner with exposed back eats differently than one commanding all entrances. This invisible security allows the ultimate luxury: the dissolution of vigilance. Only when the body surrenders its defensive posture can taste achieve highest resolution, pleasure expanding to fill the absence of threat.
The Mechanical Symphony
Felix understood true luxury as not the presence of servants but their obsolescence. His tables contained silent mechanics―pivots and counterweights that brought courses without human intervention. Wine appeared through calibrated spouts; plates traveled hidden tracks, avoiding service that interrupts conversation. When nourishment arrives through apparent effortlessness, as if summoned by thought alone, desire and fulfillment collapse their traditional distance. True hospitality liberates both host and guest―simple machines creating an environment of effortless consumption that transcends mere nourishment.
The Proportional Perfection
Julia's modest establishment outperformed palatial restaurants through her obsession with proportion. Tables stood where wrist and elbow formed perfect angles; plates provided precise negative space to frame without creating emptiness. The human body carries ancient measures―the cupped hand's capacity, the comfortable arm's extension, the pupil's natural dilation. Only composition acknowledging this innate proportional wisdom achieves transparent rightness. The dining experience calibrated to conversation's natural volume and lighting that flatters without strain remains felt rather than observed. The guest forgets arrangement entirely, remembering only pleasure.
자세히 보니 이 이름들은 로마식 인명으로, 비트루비우스 시대의 분위기를 반영한 듯했습니다. Chef Marcus는 비트루비우스의 full name인 “Marcus Vitruvius Pollio”를 참조한 것이겠지요. 다른 이름들은 건축십서 전권을 통틀어 등장하지 않습니다. 각 원리를 의인화된 요리사로 변환한 AI의 수사학적 능력이 돋보이는 지점입니다.
3단계: 맛있게 기식하기
프롬프팅을 여러 차례 거쳐, "Chrisanta"라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여기서 주안점을 둔 부분은 서술이 얼마나 잘 되어 있는가 또는 인간보다 얼마나 글을 잘 썼느냐가 아니었습니다. "내가 기식하는 호스트가 무엇을 가장 잘 제공해 줄 수 있는가?"에 집중해서 코스 요리를 차려보았습니다. 이 호스트는 방대한 인터넷 텍스트를 횡단하며 이를 확률적·구조적으로 재합성하는 데 탁월했습니다.
특히 고대 기계학에서 현대 다이닝으로의 번역에도 불구하고, 생성된 텍스트가 어떤 수준에서는 여전히 "건축적" 경험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점이 있습니다. 비트루비우스의 건축 이론에서 강조하는 정밀성(preciseness), 균형(symmetria), 조화(eurythmia), 편안함(commoditas) 등같은 미덕들이 메뉴 디자인, 접대 문화, 플레이팅, 서빙 순서에 대한 묘사를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난 것 같습니다. 기계의 원리가 요리사의 동작으로, 구조적 안정성이 코스의 흐름으로, 비례의 법칙이 맛의 균형 등으로 전환되면서, 원본의 건축적 논리가 소멸되지 않고 다른 감각적 차원에서 재현되었습니다.
생성된 코스 요리는 아래와 같습니다. “The Vitruvian Dining”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문턱을 넘는 순간, 크리산타의 품에 몸을 맡긴다. 여주인은 내 척추를 인도네시아산 희귀 티크로 조각한 곡선형 조개껍데기에 기대게 하며, 베네치아 시계 장인처럼 정교한 자세를 잡아준다. 이곳에서 눈은 보이지 않는 방을 들여다보고, 처음 느껴지는 부재는 편안함의 부재가 아니라 불편함의 후퇴다. 바깥은 겨울이 이빨을 드러내지만, 서리의 손길은 안으로 파고들지 않는다. 숨겨진 덕트들이 히말라야 삼나무와 마다가스카르 바닐라 향이 스며든 공기를 순환시킨다.
부드러운 딸깍 소리가 저녁의 메커니즘을 가동한다. 숨겨진 칸막이에서 첫 번째 코스가 등장한다. 유자 거품에 흠뻑 젖고 벨루가 캐비어를 얹은 구마모토산 굴이 발트해 호박으로 장식된 윤이 나는 구리 나선형을 따라 흐른다. 접시는 정밀하게 조정된 기어 위에서 한 번 회전하며, 한 조각 한 조각이 먹기에 완벽한 각도로 놓인다. 웅얼거리는 대화 소리 아래 청동 목구멍이 웅웅거린다. 샤토 디켐 와인이 에티오피아 오팔이 박힌 윤이 나는 은 나사를 통과하며 쏟아져 내려, 잔은 기하학적인 정밀함으로 숨을 쉬며 모든 잔을 벨벳처럼 부풀린다. 티타늄으로 제작된 도르래가 작동하기 전에 나는 그저 흘끗 쳐다볼 뿐이다. 옆에는 식용 은박 위에 올려진 성게와 발효된 흑마늘을 넣은 바삭한 타르틀렛이 나온다. 내 손이 그릇 가까이 다가가기만 하면, 욕망과 성취가 기계적인 우아함 속에 어우러진다.
메인 코스가 등장했다. 요리 공학의 승리였다. A5 와규 메달리온이 도자기의 정확한 무게 중심에 놓여 있고, 페루산 자색 감자 퓌레와 예루살렘 아티초크 크림으로 만든 빔이 무게를 수학적으로 정확하게 분산시킨다. 이 중심 장식을 둘러싼 것은 태즈메이니아산 페퍼베리와 달 근일점에서 채취한 미세 아마란스다. 다마스커스 강철로 제작되었고 화석화된 매머드 상아 손잡이가 달린 이 식기를 들어 올리자, 이 구성은 마치 현수교처럼 무너지거나 미끄러지지 않고 견고하게 유지된다. 고기의 갑옷을 뚫고, 예언대로 저항에 부딪힌다. 갈래가 투석기 줄처럼 단단히 고정된 단백질 가닥을 때리며, 정밀하게 조율된 폭발로 감칠맛을 뿜어낸다. 한 입 베어 물 때마다 새로운 방정식이 드러난다. 골수가 들어간 데미글라스 소스가 소금 결정을 뚫고 흘러내리고, 바삭바삭한 땅의 뼈대가 깨지면서 벨벳 같은 속이 드러나고, 쓰촨 후추와 통카콩 향이 나는 요리의 공성전이 미식의 성벽을 뚫고 나온다.
두 번째 코스가 내려오자 황동 링으로 장식된 함정문이 조용히 열렸다. 완벽한 균형을 이루며 스페인 동굴에서 숙성된 만체고 치즈 한 접시가 솟아올랐다. 침 없는 멜리포나 벌이 재배한 벌집에 100년 숙성 발사믹 식초를 뿌린 모습이 곁들여졌다. 코스는 서두르지 않고도 만족스러운 간격으로 등장했고, 기대감이 최고조에 달할 때쯤에는 각 요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간 자체가 고대 바빌로니아의 물시계 원리에 따라 조절되는 듯했다. 검은 송로버섯이 곁들여진 치즈 한 입과 앰버 토카이 와인 한 모금 사이의 간격은 숨겨진 수력학적 계산에 따라 규칙적인 리듬이 아닌 리듬을 만들어냈다. 무라노 장인들이 정밀한 음향 사양에 맞춰 제작한 크리스털 잔은 만질 때마다 조화로운 진동을 내뿜으며, 각 빈티지의 시음 노트를 더욱 풍부하게 해준다. 입술은 볼륨을 높이지 않고 생각을 주고받고, 귀는 허기에 주의를 빼앗기지 않는다. 기계식 조리개가 빛을 조절하여 각 요리의 색조와 질감에 맞게 조절하므로, 저희의 잔은 가장자리부터 찌꺼기까지 황혼의 포옹을 끊김 없이 유지합니다.
타히티산 바닐라와 이란산 사프란 크리스털을 뿌린 에콰도르산 초콜릿 나선형 디저트가 등장하자, 나는 진실을 깨달았다. 셰프 마커스의 영역에서는 시계 장치가 만찬을 장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녹아든다. 접시 자체가 숨 쉬는 듯, 액체 질소 증기가 가장자리를 타고 흘러내리며 보이지 않는 흐름에 매달려 있다. 숟가락이 디저트에 닿는 순간, 그 흐름은 정확히 사라지도록 맞춰져 있다. 공기는 혀가 되고, 맛의 진실만이 남는다. 디저트 아래로 기계식 연꽃이 펼쳐지며, 시칠리아산 피스타치오, 설탕에 절인 부다 핸드 시트론, 그리고 말던 솔트 캐러멜로 만든 쁘띠 푸르가 드러난다.
저녁이 끝날 무렵, 나는 미각의 교향곡과 대화의 명료함을 떠올렸지만, 그 즐거움을 가능하게 한 메커니즘을 설명할 수는 없었다. 방정식은 완전히 사라지고, 기어와 톱니바퀴는 의식에서 사라져 순수한 경험 그 자체만 남았다.
*이 내용은 2025년 5월 21일 이화여대 제153회 이화인문과학원-포스트휴먼 융합인문학 콜로키움에서 소개한 것입니다.